윤동주 하숙집 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길 57
4가지 관점으로 본 이 장소
KORLENS 큐레이션비운의 천재 시인 윤동주가 머물렀던 하숙집 터이다.
시인은 1938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면서 학교 기숙사, 북아현동, 서소문 일대에서 하숙을 했는데 1941년 5월부터 9월까지 ‘종로구 누상동 9번지’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평소 시인이 존경하던 소설가 김송의 집으로 불과 다섯 달 정도의 짧은 기간 머물렀지만, 이 하숙집에서 ‘별 헤는 밤’과 ‘자화상’을 포함해 주옥같은 열 편의 시를 써냈기에 오늘날 의미가 있는 공간으로 되새겨지
훗날 시인의 벗이자 당시 룸메이트였던 정병욱 서울대 교수는 “아침 식사 전에 누상동 뒷산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하고, 산골짜기 아무 데서나 세수를 하고 방으로 돌아와 청소를 끝내고 조반을 마친 후 학교에 갔다.”라
장소 소개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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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이드는 김영하님의 목소리로 녹음 되었습니다. 통인동의 골목 안쪽, 동네 살림을 책임지는 통인시장이 있습니다. 통인시장이 언제부터 이 골목에 자리잡았는지는 생각보다 쉽게 알 수 있는데, 이 시장에서 대대로 장사해온 분들이,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대, 서울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아비규환이었습니다. 폭격과 군인들이 지나간 자리는 초토화 되었지만, 경복궁과 중앙청 등 큰 건물들이 있었던 종로일대는 민가들이 일부 살아 남았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들, 휴전선이 생기면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 가족의 생사를 들을 수 있을까 해서 서울에 남은 사람들이 이 곳에 정착했습니다. 사람이 몰리자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를 사고 팔았고, 한 골목에 모이면서 통인동에 있는 ‘통인시장’이 되었습니다. 통인시장에서는 맛있는 음식도 팔고, 튼튼한 물건도 팔았지만, 무엇보다 ‘소식’을 주고받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전쟁 때 헤어진 가족의 생사, 남겨두고 온 가족의 생사. 시장을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은 고향 생각나는 음식 앞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모두의 소식이 통하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경복궁 옆 동네, 청와대에서 가까운 동네가 되면서 이 곳은 개발제한 구역이 되었습니다. 어느날부터 동네에 사람들이 떠나고, 시장을 누비던 상인들도 하나 둘 떠나며 빈 가게도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시장을 지키고 싶었던 상인들은 고객을 다시 불러오기 위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경복궁 옆에 있다는 장점을 살려서, 조선시대 시장처럼 엽전으로 사용하는 것이지요. 엽전으로 시장 안에 있는 가게에서 음식을 사서, 도시락에 가득 담으면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한 끼 식사가 완성되는 겁니다. 통인시장 중간에 있는 ‘엽전 도시락 카페’에 가면 현금을 엽전과 도시락 식판으로 바꿔줍니다. 식판을 들고 시장을 누비다 보면 기름떡볶이, 닭강정, 김치, 샐러드까지 식판 가득 담아와서 먹을 수 있습니다. 맛도 가득 담아 먹고, 엽전으로 조선시대 체험도 해 볼 수 있는 문화와 맛이 공존하는 통인시장입니다.
대본
이 가이드는 김영하님의 목소리로 녹음 되었습니다. 한국 동양화의 거장으로 평가 받는 남정 박노수 화백은 1973년, 옥인동의 한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됩니다. 프랑스양식의 외관을 가진 이 집은 아름다운 정원과 독특한 내부로 화가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집의 외관은 프랑스식, 내부는 일본식과 한국식, 중국식 건축기술이 모두 들어간 독특한 양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원래 주인은 바로 친일파 윤덕영의 딸입니다. 윤덕영은 딸을 매우 아꼈는데, 가장 좋은 집을 주고 싶은 마음에 당대 최고의 건축가 박길룡에게 설계를 맡겨 집을 완성합니다. 기와집과 초가집 사이에서 2층의 양옥집은 눈에 띄었습니다. 윤덕영의 서양식 저택인 벽수산장이 화재로 소실된 후에는 더 두드러져 보였다고 합니다. 광복 후 친일파의 재산이 모두 환수되면서, 이 집의 주인은 계속 바뀌다가 결국 박노수 화백의 가족이 살게 되었습니다. 박노수 화백은 이 집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이후 종로구에서 집을 매입해 2013년부터 일반에 공개되고 있습니다. 박노수 미술관은 화백의 그림과 생전에 모은 수집품, 직접 사용하던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시 내용은 매년 바뀌지만, 박노수 화백이 사용하던 유품, 수석들은 복도와 정원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박노수 화백은 수석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는데, 돌 하나에 자연의 모든 모습이 담겨 있어, 그림의 영감을 받는 원천이라 했습니다. 박노수 미술관의 내부는 촬영이 불가능 합니다. 대신, 외부와 정원은 촬영이 가능합니다. 80년이 넘은 오래된 집이기 때문에, 내부를 둘러볼 때 마룻바닥이 삐걱이는 소리가 나고, 계단도 조심조심 올라가야 합니다. 하지만 세월만이 줄 수 있는 소리와 분위기는 이 집의 신비로움을 더해줍니다. 이 곳에 와본 사람들이 극찬한다는 정원은 집을 둘러싼 작은 규모이지만, 수석과 잘 관리된 나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선과 여백, 구도를 잘 구현해냈던 박노수 화백의 그림과 그에게 영감을 주던 자연은 정원에서 표현되어 있지요. 찬찬히 둘러보면서 주인을 닮아간다는 집의 모습을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대본
이 가이드는 김영하님의 목소리로 녹음 되었습니다. 박노수 미술관에서 수성동 계곡으로 올라가는 골목길, 윤동주 시인이 하숙했다고 알려진 장소가 있습니다. 지금은 일반 가정집으로 바뀌고, 기둥에 붙은 팻말만이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북간도 출신으로,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약4년 동안 서울(당시 경성)에 머무릅니다. 원래는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지만, 3학년 때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정병욱이란 후배와 함께 하숙생활을 시작합니다. 정병욱의 회고록에는 이 시기에 윤동주와 하숙 했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기숙사에서 나와 하숙할 집을 찾고 있었습니다. 마침, 하숙생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어 직접 찾아갔는데, 그 집이 평소에 존경하던 작가 김송의 집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집에서 하숙하기로 결정했고, 머무르는 동안 윤동주는 아침 일찍 인왕산에 올라 사색을 하기도 하고, 흐르는 계곡물 아무데서나 세수를 했다고 합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집 주인 김송과 문학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 집의 주인인 김송은 함경도 출신의 항일작가였는데,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거의 매일 저녁마다 형사가 찾아와 집안을 뒤지고, 윤동주가 읽는 책의 제목을 모두 적어갔습니다. 어떤 날은 모든 짐을 검사해 편지를 뺏어가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집주인인 김송은 이런 부분을 미안하게 생각했고, 윤동주와 정병욱은 안전을 위해 가을학기가 시작될 쯤, 새로운 하숙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윤동주가 옮긴 집은 북아현동이었는데, 이 곳에는 또 한 명의 유명문인인 정지용 시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윤동주의 고종사촌인 송몽규도 같은 동네에 머무르고 있어서, 유학 전까지 북아현동에서 머무르게 됩니다. 김송의 하숙집에서 머무르는 동안, 윤동주는 <또 다른 고향>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시의 내용은 실제 자신의 경험과 시대적으로 힘든 현실을 반영한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다른 고향>을 읊으면서, 윤동주가 오고 갔을 골목길을 산책해보시기 바랍니다.
대본
이 가이드는 김영하님의 목소리로 녹음 되었습니다. 인왕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는 계곡을 이루었고, 한가롭고 그윽하며 물소리가 크다 하여 ‘수성동(水聲洞)’이 되었습니다. 수성동 계곡을 통해 흘러나온 물은 경복궁을 지나 동쪽의 혜정교까지 이어지고, 청계천과 만납니다. 때문에 경복궁의 풍수지리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장소입니다. 인왕산은 바위산이어서, 원래 산세가 험하고 나무가 많지 않습니다. 때문에 거대한 바위들과 드문드문 자리한 나무 사이로 계곡이 발달했지요. 조선초기에 이 풍경을 사랑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입니다. 안평대군은 조선 시대 선비가 갖춰야 할 재주인 시∙서∙화를 모두 잘하는 왕자였습니다. 안평대군이 수성동에 집을 짓고 경복궁에 입궐하자, 세종이 ‘게으름 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겨라’는 의미로 ‘비해당(匪懈堂)’이라는 당호를 내립니다. <<운영전>>이라는 조선시대 소설을 보면, 인왕산 기슭에 있었다는 ‘수성궁(水聲宮)’이 나오는데, 수성궁의 주인이 안평대군입니다. 소설에서 안평대군은 역시 시∙서∙화에 능한 풍류를 즐기는 사람으로 나오는데, 실제 그의 성품과 닮아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안평대군은 비해당을 정말 좋아했는데, ‘비해당48영(匪懈堂 48詠)’이라는 시를 지어 그 풍경을 즐겼다고 합니다. 안평대군의 수성궁이 사라진 조선 중기, 이 곳에 또 한 명의 천재화가가 방문하는데, 진경산수로 유명한 대가 겸재 정선입니다. 진경산수화는 우리나라의 실제 산수를 보고 그린 풍경화로, 겸재 정선은 이 진경산수의 새로운 경지를 연 화가입니다. 정선은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있는 청운동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는데, 41세때 관상감(조선시대에 날씨와 하늘을 관측하는 부서)의 천문학교수로 첫 관직에 진출했습니다. 매우 늦은 나이에 관직에 진출 하다 보니, 경상도 청하 현감이 되었을 때는 58세였고, 81세에는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나이 많은 벼슬아치를 우대하기 위한 자리)가 됩니다. 52세 때부터 인왕산 동쪽 기슭의 인왕곡에 살았다고 전해지는데, 이 곳에 머무르면서 인왕산의 풍경을 담은 인왕제색도, 수성동 등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특히 수성동이라는 작품에는 지금의 수성동 계곡과 비슷한 풍경이 보이는데, 돌다리인 ‘기린교(麒麟橋)’가 나와 있어 그림의 구도와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대본
이 가이드는 김영하님의 목소리로 녹음 되었습니다. 통인동에서 청운동으로 넘어가는 언덕길, 이 동네 토박이들은 ‘언컹크길’이라 부릅니다. 언제부터 이 언덕은 낯선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까요? 언컹크길의 유래는 19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제강점기, 이 일대는 친일파 윤덕영의 땅이었는데, 그는 이곳에 ‘벽수산장’이라 불리는 서양식 대저택을 세웁니다. 해방이 된 후, 벽수산장은 미군정에 회수되었습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을 뺏겼다가 수복하면서 미군과 유엔군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벽수산장이었던 이 건물을 미8군 장교 숙소로 사용합니다. 1954년 6월부터는 한국통일부흥위원단이라고 부르는 ‘언커크UNCURK(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가 이 건물을 사용하게 됩니다. 언커크는 1950년, UN 총회의 결의에 따라 대한민국의 통일, 독립, 민주 정부 수립과 경제재건 및 평화회복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특수한 기관입니다. 이후 1973년에 남한과 북한은 주체적인 노력에 의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되어, 같은 해 12월에 해체된 기구입니다. 전쟁 이후 돌아온 동네 사람들은 큰 건물에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외국인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니 ‘언커크(UNCURK)’라고 답하는 것을 듣고, 들리는 대로, 편한 대로 발음하니, 어느새 길 이름이 ‘언컹크길’이 된 것입니다. 언커크 본부로 사용되던 건물은 1966년 4월, 화재로 전소되어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모두 주거용 건물들이 들어서서, 예전의 화려했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언덕길에 남은 이름과, 길가에 있는 벽수산장 정문 기둥만은 옛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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