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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유적 [유네스코 세계유산]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왕궁면 궁성로 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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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Foreigner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왕궁면에 위치한 왕궁리유적은 백제 30대 무왕(600 ~ 641)대에 조성되어 그 후 사찰로 변화했다.

커플
Couple

백제 말기 익산 경영과정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왕궁으로 사비(부여)와 함께 복도로 이해하고 있다.

가족
Family

백제 왕궁은 용화산에서 발원한 능선 끝자락의 낮은 구릉 위에 조성되었다.

솔로
Solo

1989년부터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내용에 의하면 백제 말기 왕궁으로 조성되어 일정기간 시용된 후 왕궁의 중요 건물을 철거하고 탑과 금당, 강당 등 사찰이 들어선 복합유적이다.

장소 소개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왕궁면에 위치한 왕궁리유적은 백제 30대 무왕(600 ~ 641)대에 조성되어 그 후 사찰로 변화했다. 백제 말기 익산 경영과정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왕궁으로 사비(부여)와 함께 복도로 이해하고 있다. 백제 왕궁은 용화산에서 발원한 능선 끝자락의 낮은 구릉 위에 조성되었다. 1989년부터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내용에 의하면 백제 말기 왕궁으로 조성되어 일정기간 시용된 후 왕궁의 중요 건물을 철거하고 탑과 금당, 강당 등 사찰이 들어선 복합유적이다.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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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가이드

한국관광공사 오디(Odii) 음성 해설
익산으로의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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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으로의 천도 왕궁리 유적전시관에 들어서면, 백제 수도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전시물을 만나게 됩니다. 백제는 한성, 웅진, 사비, 이렇게 세 지역을 수도로 삼았다고 전해지는데요. 첫 번째 수도는 지금의 서울인 한성으로, 기원전 18년 온조왕이 한강 유역에 백제를 건국한 뒤, 5백 년 가까이 수도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자, 백제는 지금의 충남 공주인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지요. 그로부터 63년 뒤, 다시 지금의 충남 부여인 사비로 수도를 옮긴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사비를 수도로 삼았어요.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백제 무왕 대에, 사비에서 이곳 익산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이야기가 중국 남북조시대의 기록인 <관세음응험기>에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을 잠시 들어보실까요? [고대 중국의 역사학자] “백제 무왕은 익산으로 수도를 옮기고 제석사라는 사찰을 새롭게 만들었다. 그런데 639년 겨울, 크게 천둥이 치고 비가와, 이 사찰이 화재를 입었다. 불당과 탑이 모두 타버린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어떤 역사서에도, 무왕이 수도를 옮겼다는 기록은 없었어요. 그렇다면 무왕이 익산으로 수도를 옮긴 뒤 새롭게 지었다는 사찰, ‘제석사’가 유일한 단서가 될 수 있을 텐데요. 이곳 왕궁리 유적에서 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제석사에서 ‘제석사’라는 이름이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됨으로써, 제석정사라는 사찰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어요. 이 때문에 무왕이 익산으로 수도를 옮겼을 수도 있다는 가설이 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 왕궁리는 그 지명처럼 일찍부터 왕궁터로 알려져 있었어요. 그렇다면, 무왕은 왜 익산에 궁을 짓고 수도를 옮기려 한 것일까요? 무왕은 익산에서 태어났고, 또 이 도시에 잠들어 있지요. 그만큼 무왕은 익산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답니다. 그럼, 왕궁리 유적에 있었던 왕궁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보기로 해요.

왕궁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축소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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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축소 모형 전시관 중앙에는 왕궁리 유적의 축소 모형이 전시되어 있죠. 실제 왕궁리 유적의 면적은 축구장의 20배가 넘습니다. 전시관 밖에 있는 유적을 둘러보시기 전에, 먼저 이곳에서 왕궁의 구조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답니다. 가장 앞쪽에 3개의 문이 있었던 자리가 있는데요. 가운데 문을 통해서 들어가면 왕궁의 중심 건물이 있었던 자리로 보이는 대형건물터가 나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뒤에는 5층 석탑이 서있답니다. 그런데 왕궁의 중심부에 탑이 있다는 게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 이유는 왕궁이 있었던 자리에, 나중에 사찰을 지어서 건물터를 재활용했기 때문이죠. 왕궁의 정중앙은 정원 구역이에요. 이곳을 중심에 놓고 남북의 비율을 한번 살펴보죠. 정원을 중심으로 정확히 양분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데요. 앞쪽은 왕의 공적인 영역으로 의식을 치르거나 업무를 보던 곳이고, 뒤쪽은 왕의 사적인 영역으로 왕이 휴식을 취하던 곳이지요. 이제, 모형의 가장 자리를 한번 살펴볼까요? 왕궁의 외부를 빙 두르며 성곽을 세웠는데요. 보시는 것처럼 궁성을 직사각형으로 만들고, 그 안의 건물들을 일정한 비율에 따라 설계했답니다. 왕궁리 유적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왕궁의 북서쪽에서 발견된 대형 화장실인데요. 아주 독특한 유적이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전시물이 마련돼 있답니다. 이어서 화장실 유적을 알아보러 가볼까요?

유적에서 발견된 대형 공중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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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유적에서 발견된 대형 공중 화장실 이 전시물은 왕궁리유적에서 발견된 대형화장실의 모형입니다. 왕궁터에서 긴 구덩이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그 용도를 놓고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했죠. 그런데 바닥의 흙에서 회충알이나 편충알과 같은 기생충 알이 발견되면서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인분에서 나오는 기생충알이 발견됨으로써, 이곳이 화장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죠. 그럼 이제 화장실의 구조를 한번 살펴볼까요? 긴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는 용변을 볼 수 있도록 나무 발판을 만들었습니다. 화장실의 구덩이는 배수로와 연결되어 있어서, 용변이 물에 씻겨 내려가 왕궁 밖으로 배출됐지요. 일종의 반 수세식 화장실이었던 거죠. 1400여 년 전에 이 같은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다니, 정말 신기하죠? 3개의 화장실과 배수로가 합쳐지는 곳에는 작은 돌을 촘촘히 채워 놓았는데 이는 오수를 정화시켜주는 일종의 필터 장치였습니다. 또한 화장실 유적에서는 특이한 나무 막대가 여러 개 발견됐는데요. 끝부분이 부드럽게 다듬어진 이 막대는 어떤 용도로 쓰인 걸까요? 이 또한 처음에는 많은 궁금증을 일으켰었는데 종이가 귀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용변 후에 뒤처리용으로 나무 막대를 사용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대형화장실은 누가 사용했을까요? 공중화장실이니만큼 왕이나 귀족이 쓰지는 않았겠죠? 화장실 근처에는 금, 동, 유리 등의 제품을 만들던 공방터가 있는데요. 아마도 거기서 일하던 사람들이 이 화장실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왕이나 귀족들은 어떻게 용변을 보았을까요? 배수로 근처에서 변기 모양의 토기가 발견되었는데요. 왕이나 귀족들은 이 같은 이동식 변기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답니다. 8세기 초 일본의 후쿠오카 유적에서도 이 같은 대형 화장실이 발견됐어요. 전시관 뒤쪽에 일본 유적의 사진 전시물이 있어 확인해볼 수가 있습니다. 백제가 한중일 교역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이 화장실의 전파에서도 확인된다는 점은 참으로 흥미롭지요? 자, 그럼 이제 왕궁리유적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살펴보실까요?

왕궁의 위상에 걸맞는 유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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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의 위상에 걸맞는 유물들 왕궁이 있었다는 사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에 걸맞는 유물들이겠지요? 먼저 인장와, 즉 글자가 새겨져 있는 기와를 살펴볼까요? 특히 ‘수부’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어요. 행정구역을 상부, 하부, 중부, 전부, 후부 등 5부로 나누었던 백제에는 수부라는 부는 없었으므로, 한자 풀이대로 수부란 왕이 사는 곳, 즉 왕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 같은 수부명 기와는 부여 관북리유적과 이곳 왕궁리유적에서만 발견돼, 성격이 같은 왕궁이었음을 알 수 있답니다. 이어서 토관을 살펴볼까요? 토관은 회백색의 고운 흙으로 만든 관으로, 일종의 수도관으로 쓰였어요. 한쪽은 폭이 넓고, 다른 한쪽은 좁아서 토관끼리 서로 끼워서 사용했죠. 토관은 건물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상수시설에 설치했는데 이처럼 정교한 시설이 필요한 곳이라면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던 건물이었겠죠? 어떠세요? 유물만 보더라도 이곳 왕궁리유적에 백제의 왕궁이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겠죠? 이제 왕궁에 있었던 정원을 확인해볼 텐데요. 축소 모형에서 정원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백제 왕궁의 정원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해요.

미륵사지 사리함 문양과 유사한 5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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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사리함 문양과 유사한 5층 석탑 왕궁리 유적의 모형을 관람하실 때 이 석탑을 보셨지요? 왕궁이 그 기능을 잃은 후에 사찰이 지어졌고, 탑도 세워진 것이죠. 그렇다면 이 탑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요? 석탑 안에서는 사리를 보관하는 장치들인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는데요. 전시되어 있는 석탑의 내부를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사리장엄구가 두 군데에서 출토된 것이 확인되었지요. 우선 기단부에는 한자 품(品)자 모양으로 홈을 팠는데요. 동측 홈에서는 금동여래입상과 청동방울, 북측 홈에서는 쇠조각과 향나무가 발견되었고, 서측 홈에는 흙만 채워져 있었습니다. 또한, 석탑 1층의 지붕돌인 옥개석의 아래에서는 동서로 두 개의 홈이 파여 있고, 동측 홈에서는 사리병과 사리함, 서측 홈에서는 은에 금도금을 한 금강경판과 이것을 담았던 함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리함의 장식이 어디서 본 듯하지 않으신가요? 이는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중 사리호의 문양과 매우 비슷한데요. 왕궁리 5층 석탑의 1층 탑신부에서 발견된 사리병을 넣었던 사리함의 문양장식 방법이 서로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것으로 전시관 관람을 마치고, 야외로 나가 실제 왕궁리 유적을 둘러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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